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문단 편집) === 독일군 === 후방이 적 전차부대에게 들쑤셔지는 상황에서 독일군은 파탄날 뻔한 러시아 남부전선을 보전하는 것을 넘어, 소련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데 성공했다. 이는 작전술적으로 굉장한 전과다. 독소전쟁 전황 전체를 보자면 독일 중부집단군까지 몰아붙일려던 소련의 야심 자체를 좌절시켰다. 물론 로코솝스키의 공세는 다소 무리가 있었으나, 그래도 위협적인 공세 중 하나로 평가받음을 생각하면 만슈타인은 남부집단군은 물론이고 중부집단군도 보전시켰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전투 직전에 [[클라이스트]]는 A집단군을 무사히 후퇴시키는데 성공해서 남부전선에서 소련군은 더 이상 스탈린그라드에서 얻은 우위를 유지하지 못하게 되었다. 게다가 당시 남부집단군의 병력 대부분은 겨울폭풍 작전으로 소모되거나 스탈린그라드 이후 패주한 병력들이었다. 이런 병사들로 해당 전황을 극복한 것 자체가 대단한 일. 군사학적 관점에서도 의의가 깊다. 본 전투에서 만슈타인은 고전적인 기만 전술의 2차 세계대전식 해석을 보여주었는데, 포포프의 병력을 종심 깊숙히 끌어와 공세종말점에 도달하도록 유인, 소련군의 양익으로부터 격리 시켜버리고는, 돈좌된 포포프의 병력의 후방을 기동 부대로 차단한다. 이것이 바로 만슈타인의 '뒷치기' ''Schlag aus der Nachhand''다. 이걸 실전에서 성공적으로 실행함으로서 만슈타인은 이전의 전투들과 더불어 명장으로 찬양받게 되는 기록을 남긴다. 그러나 만슈타인의 기지로 엄청난 역전승을 거두었음에도 독일군이 처한 전략적 불리함을 무마할 수는 없었다. 유명한 전쟁사가인 데이비드 글랜츠나 [[앤터니 비버]] 모두 이 전투는 독일의 전략적-전술적 대승이긴 하지만 일시적인 것이었다고 말했다. 독일군이 승리한 1944년의 [[마켓 가든 작전]]과 마찬가지로 독일군은 한숨 돌릴 수 있었지만, 파멸의 시간을 잠시 늦췄을 뿐, 소련군과 독일군의 전략적 처지는 하르코프 전투 이전에 비해 그다지 바뀐 것이 없었다. 소련이 50여개 사단을 잃었다고는 하지만 당시 소련군 사단들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여파로 이미 하르코프에 도달하기 전에 각 사단의 정원이 3000명 이하로 내려갔고, 그리하여 실질적으로 병력손실은 8만여명에 불과했다[* 독일측 손실은 1만여명이다.]. 그리고 이 정도면 독일의 3배 인구를 보유하고 있는 소련측으로서는 '''견딜만한 것'''이었다. 이에 반해 독일군은 이미 스탈린그라드에서 수십만명의 최정예 병력을 잃어버렸고 더이상 공세를 지속할 여력이 없었다. 게다가 서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그동안 북아프리카로 파견된 13만명의 [[에르빈 롬멜]]의 아프리카 집단군이 항복 직전에 있었으며, 서방 연합군의 압박과 전략폭격도 점점 가시화되었기 때문에 독일군으로서는 점점 불리해질 뿐이었다. 또한 이후 히틀러의 행보도 엄청난 문제가 되었다. 독일군 장성들이 이쯤에서 전략적 후퇴를 하기를 바랐고, [[베니토 무솔리니]] 같은 경우는 히틀러에게 그쯤해서 스탈린과 강화하기를 기대했으나 [* 실제로 독일 측에서는 이 시점에서 소련과의 강화를 위한 움직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을 업적으로 생각했던 리벤트로프는 흥미를 가졌고 괴벨스 역시 히틀러에게 소련과의 협상을 요청 했다. 또한 스탈린에게 있어서도 스탈린그라드에서의 재앙을 빠르게 극복해내는 독일군의 저력을 재평가 하였고 영토를 되찾기 위한 싸움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 예상 되는 상황에서 공짜로 독일군을 소련 영토에서 몰아낼 수 있다는 것은 흥미가 동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레벤스라움, 특히 우크라이나를 포기하려 하지 않았고 스탈린이 이것을 양보하지 않으리라 생각 하였으며 정확했다. 동시에 이러한 움직임을 알고 있던 서방 연합국 역시 지중해 중심의 전략을 펼치면 소련의 비중이 너무 높아져 소련이 전유럽을 정복해버리는 상황이나 반대로 소련이 단독강화로 전쟁에서 빠져나가 버리는 사태를 막기 위해 스탈린이 이전부터 요청해오던 유럽 본토에서의 제2 전선을 구축할 것을 결정했다.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war&no=3175382|#]] ] 히틀러는 이를 무시했고 이듬해 여름 쿠르스크 돌출부를 향한 공세를 개시한다. 이후 결과는 [[쿠르스크 전투]] 참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